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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에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

                                                                    박신구 목사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신앙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관을 만들어준 것은 교회와 그 주변, 그리고 자신의 삶과 방향성 가운데서 알게 모르게 제공되고 만들어진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면, 교회의 태동기로부터, 심지어 예수님 당시로부터도 두 종류의 신학이 긴장관계 속에서 갈등해 왔습니다. 그 하나는 성공과 편의와 경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며,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영광의 신학’이며, 다른 하나는 섬김과 회복과 경쟁을 초월하는 승리를 실천하게 하며, 낮은 곳에 임하게 하는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신학을 신봉하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교회가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을 때에 사회가 어두워졌으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희석되고,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신학을 되찾고 있을 때에 복음이 능력을 일으켰으며, 교회 주위가 밝아지고,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어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는 동안 우리 주위는 어두워지고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가치관이 주도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강자가 대접받고, 성공의 결과만이 인정받는 공동체는, 작은 자가 인정받고, 실패한 자가 받아들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십자가의 신학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신학은 신앙관 곧 보는 눈을 만들기 때문에 마치 안경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두고도 어느 쪽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그 풀이와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나, 교회나, 공동체에 관한 생각들이, 그 풀이와 적용이 달라짐으로 결국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신학이 무엇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본질들입니다. 


1. 율법에서 복음으로

십자가는 율법을 완성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성령의 자유시대를 선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존들이 믿음 안에서 누리는 이 성령의 자유시대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요 속박의 시대가 아니라 해방의 시대며 수동의 종의 시대가 아니라 자율적 자녀의 시대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자녀의 행위는 이미 누리고 있는 자녀됨의 축복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의 표현이요 복음 안에서 자유를 체험한 자들의 평화의 몸짓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상전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구조를 전래무속신앙과도 결탁해서 비롯한 막연한 인과응보의 두려움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신앙인(God-fear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우러나오는 기쁨 충만한 그리스도인(Christian)의 정체성입니다. 무책임하게 자유를 구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책임이라도 은혜와 기쁨의 동기에서 그것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God-fearer)에서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진리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실제 신앙의 생활 모습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실제 삶에 있어서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종의 길은 자유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종으로만 줄곧 살아온 사람은 타성화되고 익숙해진 편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미성숙한 자녀가 자기 책임을 져야 하는 독립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종은 상전의 명령대로만 행동하면 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율법 아래 있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켰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되고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율법주의적 바리새인들의 삶의 형태였고, 그래서 자유를 선포하는 복음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반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복음을 맛본 사람들조차도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역사에서 이런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복음의 맛을 보았지만 율법주의와 그 지도자들이 들어왔던 갈라디아 교회는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거부 현상은 오늘날도 발생합니다. 율법을 외형적으로 잘 지켰다고 생각하면 신앙의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며 스스로는 율법 안에 편안히 안주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과 성령의 통치 아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품안에서만 젖먹이로 응석을 부리는 신앙인의 수준을 벗어나 장성한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변화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자율을 맛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믿음 생활 가운데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율법의 굴레들을 떨칠 수 있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2. 강함에서 약함으로

십자가는 약함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 앞에서 결단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조차 해결할 힘이 없는 나약함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로 구원을 제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한없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께서 그 위에 모든 인류의 구원의 길을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선택하려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높은 자리, 성공신화, 큰 모습에 시선을 두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나름대로 신학화하며 성도들을 부추기고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한없이 낮고 천한 죄인들의 마지막 가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는 말이 좋은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일 백년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어느새 그 말이 성공주의를 감추는 묘한 신학적 도구로 변질되는 일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영광’을 높이 외치며 자기 성공을 기도합니다. 교회 문턱을 높이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며, 교회 안에서조차도 높아지려 합니다. 교회 내에 ‘직분’(stewardship)이 아닌 ‘직급’(position-class)을 내세우며 자신의 강함을 인정받고 드러내려 합니다. 우리 교회는 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승리에 이르는 길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약함을 통해 이루는 승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한없이 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진 성육신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 세워진 교회는 약함을 찾아가야 하고, 약함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며, 약함이 고백되고 인정되는 공동체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약함을 극복하게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자기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가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영광의 자리에 사람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누구라도 영광의 자리에서 초점이 맞추어지면 아니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가 이해되는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섬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곧 낮아짐의 자리에서 다른 이를 바라보면 서로가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약함을 고백할 뿐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식함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 위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함 때문입니다. 사람이 원죄도 짓지 않았을 때 사람의 뜻은


가장 약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거듭났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뜻을 가장 강하고 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강함을 추구하거나 내세우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강함을 내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장입니다. 이 믿음의 역설이 이해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합니다. 


3. 우리 안에서 우리 밖으로

십자가는 우리만의 믿음과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유대인들만의 믿음을 이방인에게까지 내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의 '종교적' 테두리와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가 ‘우리’ 만을 생각할 때 그것은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방향성을 가늠해 줍니다. 교회가 우리 안에서 우리만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본질을 어긋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주체할 수 없는, 밖으로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사역은 우리 밖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교회의 모습은 세상을 향하여 열린 교회입니다. 아직 교회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할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에게 넉넉히 열려 있는 교회여야 할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테두리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안에 들어왔다고 세상을 향하여 또 하나의 테두리를 쳐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도 주님께서 그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우리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 십자가의 신학 위에 서 있는 교회의 모습에는 다음과 같은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어야 합니다.

 

1. 신앙관

율법적인 신앙이 아닌 진정한 복음과 은혜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나 그 구성원인 교인이 보이지 않게 율법적인 신앙구조에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은혜" 위에서 누려야 할 많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의무와 강요 위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오늘날의 교회의 역동성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이를 회복하려면 ‘복음적인 신앙관의 정립’이 필수 여건입니다. 복음적인 신앙관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수여 아래 소유하게 되는 신앙관입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신앙관은 첫째, 모든 동기의 근원이 은혜가 아니라 율법적이며, 둘째,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기본 원칙이 과정이 아니라 결과주의가 되며, 셋째, 사랑과 기쁨과 이해 대신 율법과 의무감이 교회와, 교인간에와, 개인의 영성에 난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 책임추궁과 비판이 생기기도 하며, 그 부작용으로 모든 은혜의 관계들을 해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 구조에서 자유로이 은혜를 누릴 수 없게 됩니다. 더욱이 율법주의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신앙구조들이 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공로주의와 공적주의, 자기 의, 교회성장주의, 물량주의, 상급론과 기복주의, 성공주의, 권위주의, 조건적 신앙, 종교적 신앙생활, 쉬운 목회, 경영마인드, 교회엘리트주의, 목회편의주의, 형식주의 등등입니다. 그런 곳에는 치유와 회복의 체험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발적인 동기와 자율적인 사역을 감당케 합니다. 

여기서, 책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에게로부터 바울로 이어지는 은혜에 대한 설명(인디카티브)에는 그 속에 불가분의 관계로 책임에 대한 명령(임페라티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그 통일성이 파괴됩니다. 곧 복음은 은혜로 인한 해방과 더불어 그로 인한 책임성이 있을 때에 그 통일성이 온전해집니다. 단 율법적인 의무가 아닌 복음적인 책임성이 필요합니다. ‘의무’는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책임’은 안해도 되지만 자발적인 의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책임의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 앞에서 나는 내 힘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는 연약한 죄인이며, 진노의 자식이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낮아지는 신앙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은 ‘율법체험’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야 은혜의 크기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10장의 ‘칭의’는 법정에서 목숨걸고 얻는 칭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그 목숨을 걸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무책임한 ‘값싼 은혜’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값없는’ 은혜는 ‘값이 싸서’가 아니라 ‘값을 책정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에 베풀어지게 될 모든 활동조차도 모두 자발적인 자유의 선택 하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규모와 전통이 없는 뿌리 없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의 근거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2. 말씀

교회에는 말씀의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양육의 출발점이자 내용입니다. 성경 속에 있는 깊은 진리의 말씀이 베풀어져야 하고, 이것은 단초적이고 감성적인 말씀에서 느끼는 표면적인 감정정화(카타르시스)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은혜’는 표면적인 감정동화와 지성적인 깨달음과 의지적인 결행, 이 세 가지가 함께 균형적으로 조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비성경적인 말씀이나 단순한 감정정화 수준만을 은혜로 착각하는 많은 강단의 모습 가운데, 진정한 은혜의 말씀들을 선포하고 그것을 토대로 연구하고 나누는 모습이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말씀의 더욱 깊은 곳에 도달하도록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더불어 강단도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십자가를 외치면서도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거기서 해방시키는 십자가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오직 바른 말씀관에서 나옵니다.  


3. 나눔과 누림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정립하려면, 반드시 나눔과 누림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행하신 바를  따라 서로를 향하여 섬기라는 말씀은 섬김의 방향을 교회에서 실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하여 누구나 섬기는 자로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은혜도 나눌 수 있고, 아픔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도, 희생조차도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세워주는 것도, 말씀을 함께 하는 것도 나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모든 교제의 기초가 나눔이며, 이것이 섬김의 모체입니다. 더불어,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도 합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삶이 무엇인지 누리게 합니다. 하늘나라를 이곳 지상에서 누리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임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고, 그 누림의 장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누림을 상실하면 이미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게 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그래서 자율과 책임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태생하는 기쁨이 이 땅위에서의 온갖 수고로움과 희생과 헌신의 길을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나눔과 누림은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지녀야할 본질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4. 선교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심지어는 구원받은 자와 멸망 받을 자로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온전한 시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을 기 그리스도인과 예비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으로부터만 온전한 선교의 방법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주님께서 아직도 애타게 찾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 곧 앞으로 구원의 은총에 들어와야 할 사람들로 모두를 바라볼


때에 그들을 따로 구별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교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들에게 열려있는 교회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길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행사들이 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쉽게 접하고, 그 접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전염되는 교회(Contagious Church)의 모델이 우리가 지향하는 선교의 모습입니다. 


5. 번식

성장지상주의와 물량주의는 오늘날 교회를 팽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는 ‘팽창’이 아닌 ‘번식’이 필요합니다. ‘팽창’(expansion)은 단순한 숫자나 외형의 증가를 말하지만, ‘번식’(multiplication)은 생명의 태동을 통한 성장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복 주셨던 생육과 번성의 과정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번식은 반드시 ‘분가’의 형태를 취합니다. 자녀가 일정한 기간 이상 자라면 스스로 독립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도 끊임없이 재생산을 통해서 번식해 나가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개인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번식해 내는 것이나, 소그룹의 번식,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 자체의 번식이 번성과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이러한 건강한 생장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교인’이나 교회가 이 사회를 어둡게 하고,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6. 치유와 회복

현대인의 삶 속에서 얻게 된 많은 상처의 모습을 그대로 안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참된 치유와 회복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죄와 상처가 치유받고 회복되며,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명과 책임을 변화된 인격에 따라 이루어 가는 모습이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와서 상처를 싸매 주고 더 들어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적인 진정한 은혜로부터 오는 영적인 평안이 누려지면 이러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체험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고 더 나아가 사람들 간에, 그리고 교회 밖에까지 치유를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7. 평신도 사역

교회의 좋은 모습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가 목회자의 목회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자원 있는 일군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평신도가 교회를 함께 이끌고 나갈 수 있을 때에 그곳에 자율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은사가 있는 자원들을 교회에서 활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섬김과 그 은사에 맞는 장의 공급으로서 어울리게 되는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현하려는 것이 평신도 사역의 목표입니다. 자신들의 일을 만들고 자신들의 자원을 활용하게 함으로써 보다 능동적인 섬김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8. 소그룹(셀=세포) 모임

긴밀하고 역동적인 나눔의 장을 위하여 소그룹 모임들이 활성화된 교회의 모습을 견지하려고 합니다.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모임으로서 양육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부분까지 함께 참여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장년 층부터 어린 영혼들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신들에게 맞는 다양한 그룹에 함께 할 수 있는 조그마한 그룹들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구성된 소그룹들의 이점을 살려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족애를 느끼게 만드는 공동체는 이 소그룹 안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영혼들에 대한 양육도 학교 패러다임에서 가정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많은 종류의 양육 프로그램과 모임의 시간들이 이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고 싶은 소그룹 모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게 될 때 일어나게 되는 이미지 잔향의 효과를 가져다주게 될 것입니다. 



▣ 교회란 무엇인가? - 메타 교회를 향하여


바른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왜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성격과 방향성을 가늠합니다. ‘메타’(meta)라는 말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메타 교회’란 사람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변화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맞는 구조로 변해 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능력으로 인하여 그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교회가 그들의 모임이라면 변화와 갱신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변화가 없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자라가는 성숙을 멈춘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력 있는 존재는 성장하게 마련이고, 성장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구조와 조직, 그리고 체계가 경직되어 있으면 생명력은 저하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메타 교회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교회 조직과 제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 조직과 제도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움직이는 변화를 그만두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 조직을 위하여 사람들을 모아들인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이나 제반 사역들이 삶의 변화라는 주님의 목표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 사역들을 진부한 것으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사역의 요구와 필요가 바뀌면 시설, 우선순위, 전략 등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과 은혜가 없으면 늘 예배의 의식과 조직, 제도를 강화하려 한다는 교회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메타 교회는 ‘조직체'(organization)에서 ‘유기체’(organic)로 변화를 모색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타 교회의 방향성 가운데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 예배당 건물이나 조직, 제도나 기관이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즉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종종 교회가 교회 조직 자체를 유지하거나 제도나 직제나 이에서 파생되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직에 필요해서,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 전도된 것입니다. 목회도 교회를 위한 목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목회는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신 사람을 위하여 목회가 존재합니다. 메타 교회는 사람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스스로 조직이나 직제나 목회의 형태를 바꾸어 가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는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모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마 28:19). 모든 교회의 원형인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단순한 "교인"(마23:15)이 아닌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11:26). 본디 성경 자체에서, 교(敎)에 들어왔으나 그 강령을 준수할 필요가 없는 "교인"과, 모든 가르침을 준수해야 할 "제자"라는 말을 구분해 쓰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임으로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큰 무리를 가르쳤고 그 가르침 이후에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또한 모든 족속으로 "교인"이 아닌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에서 말하는 개개인의 제자화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로서의 제자화 과정이 필요하고 그곳에서 공동체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양육이 필수적인데, 메타 교회는 세포 그룹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양육의 구조들을 일구어 가는 교회입니다. 이 세포 그룹들 속에서 서로를 돌보며 사람들의 깊은 곳에까지 양육하는 제자화가 이루어집니다. 


셋째,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개인보다 '관계'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조직을 우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구조는 사역자들이 능력을 발휘하게끔 동기를 부여하고 후원하는 ‘관계성’이 늘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 관계성이 없으면, 사명에 참여케 하는 ‘1차 동기부여’는 될지라도 그것을 유지시키는 ‘2차 동기부여’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목적에 합당치 않은 공동체는 사역자들을 금새 탈진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해치는 것은 교회를 해치는 것입니다. 사랑, 평화, 의(義), 화목 등 성서의 중요한 개념들은 관계적 개념입니다. 개인 이기심과 집단 이기심을 극복하며, 자기도취와 집단 무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며 남을 용납하며 사랑하는 영성이 최고의 영성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이 나오며, 신약성서에서도 '나'보다는 '우리'로서 교회의 개념이 나옵니다. 주기도문도 '나'의 기도가 아니고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공동체, 예배 공동체, 성령 공동체, 선교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나눔과 누림이 필요하게 됩니다. 메타 교회는 나눔과 누림을 충만하게 채우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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