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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 대한 궁금증들...

나눔N누림 1 19309 0


성경에서 요셉에 대해서 보다보니

궁금한 생각들이 들어서 여쭤봅니다.

 

1.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된후에 풍년의 기간동안 왜 야곱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리고형들을 진정 용서한것인가 하는 의문(형들에게 곧바로 알리지 않고 형들을 당혹스럽게 만든일들)

이 생깁니다.

 

 

2. 요셉이 다 신론자는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왜냐면요셉의 아내는 애굽제사장 보대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고,

기근이 있을때 제자장들이 가꾸는 밭은 사들이지 않고정기적으로 녹을 맏아먹고 넉넉하게 하였다고

기록된것과나중에도 세법을 만들어서 제사장의 땅은 바로의 것이 되지 않았다고 나오는것으로봐서

요셉이 두려워한것은 하나님 말고도 이집트의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영향을 받은것은 아닌가요?

요셉이 죽어 장사되고 나중에는 뼈를 가지고 나오라 하였지만

이집트에 미이라로 장사된것도 그런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3. 장소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요셉야곱아브라함들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는

특정한 장소 (헤브론마므레벧엘가나안 등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집착하는 장면들이 보입니다.

그러면하나님께서는 의미가 부여된 또는 약속된 장소에 대한 땅에 대해서 다르게 복을 주시나요?

또 지금도 동일한 영향력이 있는것인가요?

1 Comments
나눔N누림 2018.07.10 16:02  
친구신구 2012.11.16 00:06
요셉에 대한 궁금증들은....


각기, 질문 항목별로 답하지요.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된 후에 풍년의 기간동안 야곱을 찾지 않은 까닭은, 41:51에 그가 므낫세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의미를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둔 것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서 당한 고통을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형제와 아버지를 만날때의 감격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요셉이 이때까지 적어도 형들이 자신을 버렸으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그 고통이 컸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형들 때문에 야곱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형들을 진정으로 용서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용서하기 전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잘못한 자들이 진심으로 뉘우쳐야 관계 회복이 되기 때문에, 그 과정을 형들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를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할 때에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만, 그런 상황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가능하지요.

요셉이 형들을 진정으로 용서한 것은, 나중에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에, 자신들에게 총리의 권세로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때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형들을 안심시킨 장면에서 분명해집니다.



2. 요셉이 다신론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셉의 신앙적인 자기 연민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요셉이 비록 애굽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애굽의 총리 신분으로서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보디베라가 섬겼던 태양신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바로의 권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요셉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인 자신이 짓고(당시 근동에서는 어머니가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의미를 보면, 그가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이 제사장들의 토지를 사지 않은 것은, 토지를 바로에게 파는 이들은 양식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당시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고 있어서, 자기 토지들을 팔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지 못한 것임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성경에 요셉의 신앙과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는데, 아람 장군 나아만이 참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서 엘리사에게 미리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바로 자기가 섬기는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서 몸을 굽혀 절을 할 때에 하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음을 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단순하게 답변하지요. ‘평안히 가라!’

이 답변은 나아만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냥 그 마음을 사주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사는 동안, 그 몸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마음 만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도 절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절하면서, 마음만 하나님께 있으면 된다고 하시면 아니됩니다. 조직이나 집단으로 우상숭배나 고사지낼때, 제사 등과 관련하여 모두가 그러하니 나도 나아만 같이 하거나 요셉같이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것은, 쉽게 합리화할 내용이 아닙니다. 나아만이나 요셉이 지녔던 아련한 마음과 우리가 쉽게 합리화하는 것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이며, 따라서, 전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역시 미이라로 관습에 따라 처리된 것은, 그것이 애굽의 신들에게 자기 내장을 의탁하는 과정을 밟는 것으로 보아, 역시 어쩔 수 없더라 하더라도,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또 애굽식 장례를 치르게 된 것으로 보아 요셉이 족장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을 보전하는 조상 족장에 들지 못한 것이지요.



3. 족장들의 장소에 관한 집착은 당시의 신앙으로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들의 믿음은, 모두가 동일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각기 살고 있던 각 시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던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족장시대에에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수준과, 그 이전 원역사 시대에 믿었던 인식 수준이 다르고, 그 이후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이후 시대에는 또한 믿음의 수준과 요구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드라빔 같은 경우, 족장 시대에는 일정 허용이 되어 정죄받지 않았지만, 나중에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우상숭배로 되고,

또한, 산당 제사가 처음에는 허용이 되지만, 나중에는 우숭숭배로 정죄되는 등, 시대가 흘러 후세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더 많이 주어졌기에, 믿음의 수준이 다르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가 점점 발전하였다’ 하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막연한 예언으로 인식되었다가, 나중에 신약 시대에는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세워지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인식 수준에서 오래전 성경의 인물들의 신앙을 평가해서는 아니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오래전 시대더라도, 특별한 장소가 특별한 복을 받는 것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가서 살게 해 주신 복으로 받는 것이지, 그 장소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복이었지만, 거기서 약속을 받아 누릴 만한 자격이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그들을 쫓겨나게 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러니, 특별한 장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뿐이지요. 오늘날은 더더욱 아니되구요.

더 발전하여, 풍수에서나 특별한 집이나 장소에 귀신의 영향이 있다는 식의 무속신앙은 불가합니다. 아무리 신령하다 하는 무당이 살던 집이라도 그것을 무속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불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면, 그 영항을 입게 되는데, 사탄이 두려움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고로 성지 순례가 그런 점에서 개신교에서는 불가하다는 점도 생각해 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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