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의 왜곡
폴 드 세느비유(Paul de Senneville)가 작곡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라는 뉴에이지 음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이라는 피아노 주자가 연주하여 크게 선풍을 일으켰던 피아노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프랑스에서 이 곡에 앙드레 리우(Andre Rieu)라는 지휘자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픽션을 가미해서 음악을 연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픽션의 스토리는, 한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 한 팔과 한 다리를 잃게 되자, 전쟁 후에 차마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갈 수가 없어서 조용히 사라졌는데, 그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하는 여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멀리서나마 축복해 주려고 결혼식이 열리는 교회에 갔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는데,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신랑은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남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제서야 충격을 받고 깨닫게 된 이 남자는 결혼식에서 돌아와서 그 여인에게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만들어 들려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을 국내의 한 사람이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원글에 이런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작곡된 배경에 그런 슬픈 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래서, 원 글을 올린 사람이 바로 수정하는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게 아니구요, 작곡가는 따로 있고, 연주자가 곡에다 사실이 아닌 픽션을 가미해서 영상 스토리로 연주한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주세요.’
그 다음에 달린 댓글들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그렇게 슬픈 배경으로 작곡이 된 거군요...’
다시 원글을 올린 이가 수정 댓글을 달아줍니다.
‘아, 그게 아니라 사실이 아닌 픽션, 허구라니까요....정정해 주세요..’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수정 댓글이 달려있는데도 계속해서 같은 종류의 댓글이 달립니다.
‘아, 그 곡에 그렇게 슬픈 배경이 있었나요?’
‘아, 그게 아니라 픽션이라니까요...’
‘아, 그 곡에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다시 들어봐야겠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에요....’
‘아, 제가 피아노로 치던 그곡이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었군요. 이제까지 몰랐네요. 다시 쳐봐야겠네요...’
이런 댓글이 무려 80여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원글을 올렸던 이는 수정 댓글을 달다가 포기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댓글은 이러했습니다.
‘아, 아름다운 사연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널리 전파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에 꽤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컸던지, 제가 아는 목사님도 그것을 사실인 것으로 알고 설교 시간에 예화로 들었답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의 전설을 아십니까?.....’
감동적이라면, 사실 관계를 살피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보고 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름대로 내용도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사실이 아닌 무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스러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왜곡입니다. 그런 왜곡이 얼마든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서 더욱 무섭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느끼기에 은혜가 된다 하면, 그것이 문맥에 맞는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 신비한 말씀 풀이를 한다 하면, 그것 또한 성경의 진리에 맞는지 안맞는지 검토하고 점검하려는 습관도 보기가 힘든 듯합니다. 그래서 신천지 같은 이단에 오히려 성경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이 있는 분들이 넘어가곤 하겠지요. 심지어 돌아다니는 예화들도 사실이 아니거나, 본질이 왜곡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그런 엉터리 내용들이 계속 돌아다니는 것은 감동적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감동은 사람의 ‘감정적인 동요’(emotional moving)여서,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감동(inspiration)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가 쉽다고 저는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감정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직 냉철하게 분별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에 대한 바르고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때로 우리의 영성에나, 바르고 정직한 말씀을 듣는 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여서, 바르고 건강한 믿음과 영성, 그리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감정을 넘어서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