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가치
골로새서 3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사실 실존적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이미 불편한데 어떻게 평안이 마음을 주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불편한 관계나 마음을 평안한 마음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불편해지면,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마음의 상태나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말씀에 사용된 두 가지 용어를 그 본디 성경의 말, 헬라말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먼저, “주장하게 한다”(헬, 브라뷰오, brabeuvw)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단 한번 나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판(헬, 브라뷰스, brabeu;")이 내리는 판정을 따르라 그 말입니다.
당시 심판 체계가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여서, 심판이 하는 일은 경기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살펴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자격박탈을 선언하는 일이 주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경기를 훌륭하게 완수하였어도 심판이 자격박탈을 선고하면, 그 상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심판이 박탈하지 않은) 상”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다음으로, 헬라말의 평강(=평안=‘에이레네’ eijrhvnh)이라는 말은 “하나로 결합하다”, “연합하다”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용어를 제대로 알고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서로 하나가 되어 평안에 이르는 일”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최우선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서로 하나가 되는 일에 평안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이루어 내도 그건 심판이 ‘자격박탈이다!’ 하고 판정을 내린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마음의 상태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엄청난 기준을 무시하게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의외로 옳고 그름에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바로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걱정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른 것을 추구하려는 기준이 아니라, 평안을 추구하려는 기준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도, 그것만으로 사회나, 교회나 믿음이 더 발전할 수 있겠는지 걱정이 생깁니까?
혹, 평안을 해치더라도 이렇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이 더 우선적이고 중요하다고 느껴집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 염려가 바로 우리의 약점이자 한계이고, 더 나아가 속임수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옳고 그름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 누구나 자신은 은혜와 평안으로 대접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평안이 최우선의 원칙이 되어도 우리가 염려하는 부분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잘못된 일도 뒤로 하고 눈감으며, 모든 것을 소위 “은혜롭게” 하라는 말에 감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그렇게 미봉적이고, 우습거나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평안이야말로 정말 관계적인 용어이며, 모든 행동의 규범으로 으뜸가는 것이라 해도 그 무게가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실될 때에만 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주변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실된 사람이라면, 그 추구하는 바름도 그 방법이나 과정이 평안할 것입니다